일상

시절인연, 그 한복의 순간뜻하지 않게, 그러나 온전히 나답게

조 은 2025. 7. 22. 16:31

2025년, 해가 바뀌면서 마치 밀려드는 파도처럼 새로운 일들이 나를 향해 덮쳐왔다.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고, 설렘보다는 책임감과 부담이 짙게 깔려 있었다.
회사와 업무의 구조적인 변화, 그리고 예기치 못한 개인적인 과제들이 연달아 닥쳐오며 나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이미 숨 고를 틈 없이 휘말려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인연은 스스로 찾아왔다.
2년 전, 뷰티 업계에서 활동하는 지인이 어느 날 내게 권했다.
“한복모델 선발대회, 한 번 나가봐요.”
그 말이 내게는 농담처럼 들렸다.
출장과 업무로 하루하루가 빠듯한 나에게, 모델이라니.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2023년과 2024년, 매년 봄이 오면 그는 어김없이 다시 물었다.
“올해는 꼭 도전해봐요. 정말 잘 어울릴 거예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2025년, 올해는 그 말이 내 마음에 걸렸다.
정말 갑작스럽게, 별생각 없이 지원서를 썼다.
그리고 그 일은,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는 문이 되었다.
며칠 뒤, “전국 7,800명의 지원자 중 본선 진출 확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놀라움이 컸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당황함이었다.
나는 모델이 되기 위한 준비는커녕, 대회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지도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지원’이라는 하나의 행동만 했을 뿐이었다.
더욱이 내가 지원한 서울 지역은 본선 당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국에서 경쟁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런 서울에서 본선 진출이라니, 어딘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같았다.
본선 무대는 서대문구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열렸다.
새벽부터 거센 비가 쏟아졌고, 나는 비를 뚫고 서울로 향했다.
머리에는 당의에 어울리는 고전적인 머리 세팅, 얼굴에는 한복의 기품을 살린 메이크업. 단아하게 차려입은 중전 컨셉의 당의는 손끝까지 천으로 가려주는 한복이었다.
포즈에 자신 없는 나로서는 손을 가릴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대 위에서 최대한 움직임을 줄이고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
호텔 대회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본선 진출자들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준비 중이었다.
조명은 찬란했고, 음악은 웅장했으며,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 세트장이었다.
대기실은 긴장된 표정으로 포즈를 연습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 나는 마치 대회 스태프처럼, 관찰자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워킹도 포즈도 제대로 연습해본 적 없던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무대에 서기로 했다.
13번, 내 번호였다.
빠른 순서라 긴 대기 시간도 필요 없었고, 숫자도 마음에 들었다.
무대에 올라 워킹을 하고, 준비한 미소로 천천히 시선을 나누며 내려왔다.
연습 없이 무대에 오른 나였지만,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이 내 무기가 되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완벽에 가까운 포즈와 표현력으로 무대를 채웠다.
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한복을 반납하고,
화장을 지우고, 대회장을 나섰다.
그런데 10일 뒤, 생각지도 못한 연락이 왔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최종 결선 진출입니다.”
잠시 웃음이 났다가, 이내 깊은 불안이 몰려왔다.
‘진짜 모델이 되면 어쩌지? 회사는? 주변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혼자 감당하는 무게가 컸다.
내게 출전을 권유한 원장님 한 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결선 오리엔테이션은 매주 법당에서 상근하는 화요일이었다.
법회에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레 OT에 다녀왔는데, 돌아오는 법회 날 공양팀장 세화법우님이 물으셨다.
“조은법우~ 화요일에 무슨 일 있었어요?”
당황했지만, 결국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리고 살짝 부탁드렸다.
“아직 아무도 몰라요. 비밀로 해주세요.”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 많은 법우님들이 알게 되었고, 심지어 담양 정토사에 계신 법우님들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그 속도에 놀랐지만, 밝은 웃음으로 축하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조심스러운 내 마음도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결선 무대는 송도의 인스파이어호텔에서 열렸다.
그날은 전 세계 외교사절단이 참석하는 국제 규모의 대회였다.
호텔 안팎은 의전팀과 보안팀, 대회 스태프들로 분주했고,
그 풍경을 보는 나는 마치 행사 진행자처럼 그 현장을 분석하고 있었다.
무대는 본선보다 두 배 이상 컸고, 조명과 음향은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객석은 1,000석이 넘는 좌석과 디너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모두가 진심으로 준비하는 진지한 분위기였다.
이번엔 ‘웨딩한복’을 선택했다.
비즈로 장식된 화려한 한복은 조명을 받으면 눈이 부실 만큼 반짝였고,
자세한 포즈 없이 손만 뻗어도 충분한 표현이 되었다.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이어지는 결선은, 개별심사와 그룹심사의 합산 점수로 평가된다.
오후의 그룹심사는 다른 후보자와 짝을 이뤄 함께 무대 위에서 워킹해야 했다.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며 연습을 하고, 점점 입장객들이 늘어나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이 서서히 밀려왔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조은! 이건 너의 시간이다. 이 무대는 너를 위한 공간이다.”
미소를 띠우며 파트너와 함께 무대를 걷고,
객석을 향해 단아한 포즈를 취하며 미소 지었다.
마침내 저녁 9시가 넘어 결과 발표가 시작되었다.
421명의 결선 진출자들이 숨죽인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행자가 한 명씩 번호를 호명했고, 드디어 내 번호,
“329번”
번호가 불리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몇 번을 다시 확인했다.
맞다. 내 번호였다. 나는 대한민국 한복모델로 임명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베스트 포즈상”이라는 특별상까지 수상했다.
스스로 가장 자신 없다고 생각했던 포즈에서 상을 받다니,
내 안에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가능성이 있었던 걸까?
무대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상장을 받고,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내 첫 모델 도전은, 아름답고도 당당한 결실로 마무리되었다.
늦은 밤, 호텔을 나서며 창밖으로 스쳐가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환하게 빛났다.
이 모든 일은 나에게 다가온 ‘시절인연‘ 이었다.
욕심내지 않았고, 억지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때가 되었기에 문을 열었고,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통해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이미, 시작 전부터 2025년 대한민국 한복모델이었다는 것을.
앞으로 1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의미 있고도
소중한 사명을 진심을 다해, 그리고 즐겁게 해내고자 한다.
 
 
P.S 나의 작은 용기가 누군가의 영감이 되기를 바라며...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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